나의 차가운 피를 용서해

주말인데도 한자수업을 위해 학교에 갔었다. 하루 전에 축제가 끝나서인지. 아직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천막들이 지저분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축제기간 도서관 길을 비추던 조명들도 흉물스럽게 걸려있었다. 마치 밤새 나이트에서 놀다 새벽에 들어와 화장도 안 지운채 잠자는 내 동생의 얼굴을 연상시켰다. 그래도 이들에겐 뜨거운 열정이라도 있지.... 혼자서 속으로 실없는 말을 되뇌며 스산한 정오의 학교를 걸어 들어갔다.

부끄럽습니다.

오늘은 또 대대적으로 청계광장에서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이번 집회에 앞서 교육부에서는 현장에 교사 900명을 배치해 '학생지도'에 나서겠다고 했는데도 (아니, 그럼 이 900명의 지도교사들도 집회 참석인원으로 치는 건가? ㅋ) 수많은 학생들이 또 집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내가 직접 가서 ‘본 것’이 아니라, 네이버 뉴스로 ‘들은 것’이기에 인용 어구를 사용했다.

사진출처 : 프레시안 /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0518003021

연일 촛불문화제 기사를 접하면서 스스로에게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낀다. 막연히 필요할 것 같은 몇몇 자격증을 좇아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영어 몇 마디 배워보고자 아침마다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정작 눈앞에 벌어지는 거대한 일은 애써 외면하는 모습이란...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도 세상에 고개를 쳐들고 뜨거운 피를 드러내는데, 나의 이토록 차가운 피는 식을 대로 식어서 세상에 고개 숙이는 걸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누구를 위하여 묵념은 했나?

생각해보니, 이 냉랭하고 부끄러운 기분을 몇 년 전 고등학교에서 처음 접했던 것 같기도 하다. 때는 내가 고2의 무한경쟁 터널을 지나갈 무렵. 2001년 9월 11일. 비행기가 빌딩에 부딪히면 어떻게 되는가를 CG없이 라이브로 무한 반복 시청한 다음날이었다.  우리는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난다느니, 이제 군복무기간이 연장된다느니 하는 멍청한 대화들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수업 중에 들리는 갑작스런 교내방송. ‘어제 미국에서 벌어진 안타까운 테러사건을 추모하며 잠시 묵념 하겠습니다.’

흔해 빠진 순국선열을 위한 묵념도 아닌, 며칠 전 돌아가신 아무개 아버지를 위한 묵념도 아닌, 쌩판 모르는 미국 국민들을 위한 묵념이라니! 영화처럼 사라져간 지구 반대편 생명체에게 보내는 우리의 묵념은 그들이 알아주던 말건, 묵묵히 용산구 어느 고등학교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 왜 난데없이 수업도중 묵념을 해야 했을까? 잔인한 폭력에 희생당한 무고한 시민들을 기리는 의미였다면 아마 우리는 고등학교 3년 내내 묵념을 영단어 외듯 해야 했을 것이다. ‘아프리카 내전으로 희생당한 지구촌 친구들을 위해 묵념 합시다’, ‘중동지역 테러 피해자들을 위한 묵념으로 오늘 종례를....’

고민 끝에 내가 얻은 대답은 이것이었다. 그냥, 교장이 시켜서.

그날의 황당한 묵념 세리모니 만큼이나 쇼킹했던 건 창밖으로 보이는 학생주임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한 손에 하키 채와 한손엔 바리캉을 들고 학생들의 선도와 이발(?)을 즐겨 하시던 괄괄한 성격에 그 분도 그 시간만큼은 한 마리의 양처럼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분의 그런 온순한 짐승의 실루엣은 세상은 이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너의 신념이 무엇이든, 가치관이 무엇이든, 모두가 믿는 세상의 순리에 잠자코 고개를 숙여야하는, 무조건 그 말을 믿어야만 하는 게 세상의 룰이라고 말하던 그 실루엣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부끄럽고, 부럽다.

지금 내 몸 속에도 당시 학생주임 선생님과, 잠자코 묵념을 했던 대다수 학생들의 혈관에도 흘렀던 차가운 피가 흐른다. 그래서 부끄럽다. 하지만 당시 내 나이와 같은 지금의 중고등학생들은 다르다. 그들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허망한 사회적 통념에 반문을 할 줄 안다. 어른들이 맹목적으로 믿는 한미동맹이란 신화에서 그들을 자유롭다. 혼자만 살려고 발버둥치는 나같은 20대를 비웃듯이 그들은 연대聯隊와 공존을 알고 자기주장을 당당히 표현한다. 나는 이들의 뜨거움이 부럽다.


by nOiZe | 2008/05/18 03:02 | 이십대의 흔적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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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Geor at 2008/05/18 04:26
본문글에 크게 공감합니다. 하지만 20대들이 그러하듯 10대들도 이제 이 불합리한 사회에 적응하게 되겠죠. 이 악의 사슬을 끊는게 우리의 할 일이 아닐까 합니다.
Commented by 琳☆ at 2008/05/18 10:05
마냥 부끄러워만 해선 얼굴이 잘 익은 홍시마냥, 술을 연거푸 들이킨양 발그래 해서 끝나겠지요.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고 하던가요
Commented by draco21 at 2008/05/18 10:43
때되면, 인연되면 나가보세요. 가보면 아시겠지만.. 안온다고 뭐라 하는 분위기 아니옵고.. 오히려 '즐겁달까요' ^^: 원체 분위기 파악 잘 못하는 사람인지라 제가 맞다고 말씀드리기는 뭐합니다만..
Commented by 케이샤이 at 2008/05/18 11:56
차가운 피가 뜨거운 피를 부러워해서 뭐합니까 껄껄.
Commented by 낭만폐인 at 2008/05/22 00:28
묵념... 이번에 중국에서 수만명이 지진으로 죽었는데 학교에서 묵념은 했을까요? 동남아 쓰나미때는? 일본 대지진때는? '미국'에게만 베푸는 과잉 친절이 도를 넘어 '숭배' 수준이 아닌가 하는...
Commented at 2008/05/22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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